글제목 :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조회수 : 1879
글쓴이 : 알지 날짜 : 2013-01-14 11:41:00 추천 : 0
“여러 사람을 일시에 속일 수 있고 또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습니다.”

링컨의 이 말은 거짓과 위선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어떤 사람은 말뿐인 위로이지 현실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최근의 선거 결과를 보면, 승자가 모든 권력을 가지는 대의민주주의가 과연 시민의 ‘대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51%도 투표율을 고려하면 지지율은 40%가 넘지 않지만, 거짓 정보와 불법적인 방법이나 허구적인 이야기나 왜곡된 이기주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 아니냐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요즘 가장 뼛속 깊이 느껴지는 ‘Winner takes all’의 현실에 많은 노동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런 절망감이 내뿜는 고통이 아닐까 싶다. 아수라 같은 세상에서 잠깐이라도 비껴갈 일이 있을까? 초야에 묻힌 고고한 선비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가장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바탕을 둔 과학도 생각해볼 만하다. 그렇지만 과학에도 거짓은 존재한다.
가장 흔한 것은 남의 것 가로채기이다. 펄서를 발견한 여성 연구원보다 별로 한 것 없는 남성 책임 교수에게 노벨상이 주어진 일은 논란이 되었지만, 그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흐지부지되었다. 처음 DNA의 이중나선 구조의 실마리를 잡은 사람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여성이다. DNA의 X선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을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연구실 책임자 윌킨스는 왓슨과 크릭에게 그 데이터를 보여줬다. 데이터를 ‘보고’ 이중나선 구조라는 모델을 발표했다. 결국 세계를 뒤흔든 유전자 구조 발견의 명예와 부는 왓슨과 크릭에게 돌아갔고, 프랭클린은 이런 부조리를 관심 있게 바라보는 몇 사람에게 기억될 뿐이다. 20세기 초까지 과학은 남성 중심의 무대여서 여성 폄하가 은연히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두 번째는 하지 않은 것을 실험한 것처럼 하는 경우이다. 지금도 여진이 남아있는 황우석 사건은 익숙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는 첨단 과학일수록 그 실체를 밝혀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먼저 발표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돌아가는 관행은 과학이 진리 탐구가 아닌 사업의 승자독식을 닮아가 씁쓸하게 한다. 이런 탐욕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데이터 조작은 역사적으로 악명이 높다. 유전학이라는 세계를 연 멘델의 강낭콩 실험은 지금 한다고 해도 그렇게 선명하게 실험결과가 나올 수 없다. 조금 더 들어가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에서 했다는 낙하실험은 한 기록도 없지만, 갈릴레오 스스로 굳이 실험할 필요성이 없다 말 할 정도로 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뛰어난 과학자들의 이론이 틀린 것은 아니니 뭐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다만 자신의 이론을 그럴듯하게 보이고 빨리 인정받기 위한 ‘데이터 마사지’의 유혹은 심한 경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에 보면 골상학이 어떻게 흑인들은 노예로 유태인은 백인보다 낮은 인종이라는 인종차별주의의 근거를 제시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였던 모턴의 데이터를 누구나 보기만 했다면 알 수 있는 허구라는 사실을 100년 가까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유리하면 검증하지 않으려는 주류 집단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이다.


세 번째는 남의 것 가져오기이다. 나라에서 쓸 만한 학자들은 다 논문표절을 하는 것인지 몇 년 동안 많은 공직의 입후보자들이 구설에 올랐다. 심지어는 오타까지 그대로 베끼는 친절까지 배푼다. 어떤 이라크인이 남의 논문으로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채용되고, 이라크 왕실에서 연구자금을 지원받고 수십 편의 표절 논문을 여러 학술잡지에 게재하며 고급 승용차를 몇 년 동안 몰고 다닐 정도로 호화생활을 한 것을 보면 표절이 얼마나 흔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지를 알게 한다. 심한 경우는 2000년이 지나서야 밝혀진 일도 있다. 천동설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데이터는 사실 본인 살던 이집트가 아닌 그리스 학자의 데이터라는 사실이 근대에 와서야 밝혀졌다. 진실을 탐구하는 학문, 특히 실험이라는 가시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실적이 연구자금의 바탕이 되고 지도 교수에 대한 충성이 미래를 보장하는 연구 환경, 내부 고발자를 오히려 고립시키는 조직 이기주의, 자국 이기주의 등 진실을 감추는 지뢰밭 들이 꽤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황우석 사건의 실체 규명의 결정적 역할은 브릭이라는 생물학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웹사이틀 통해 이루어졌다. 정보는 민주적이다. 발달한 네트워크는 예전보다 거짓을 더 빨리 더 세밀하게 드러나게 한다. 비록 진실이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이 누군가에게 깜깜한 밤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누군가에게 추운 삭풍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지라도 진실과 정의는 바로 설 것이다. 길게 보면 잠시 퇴보한 듯 보이는 역사는 다시 진보의 길로 갔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