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소설) 조회수 : 3698
글쓴이 : 차니 날짜 : 2012-10-25 11:58:00 추천 : 0
최근 10여년 동안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마음에 여유가 없어 좀처럼 소설들을 읽지 못했다.

현기영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밴쿠버에 와서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여러 해 전에 모 방송국 프로그램의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던 작품인데, 작가의 성장담을 다루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작가가 겪어 지나왔던 '제주 4.3 항쟁'이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고 하겠다.

제주 출신인 현기영은 이미 '4.3'을 다룬 <순이삼촌>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이 작품은 대학 다니던 시절인 1980년대에 많이 읽히던 책이었다.

1941년 생인 작가는 일제 말기와 해방기의 제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와중에 제주도에 잔인한 상처를 남긴 '4.3'을 겪어야만 했다.

폭력적인 시대에 이념적 배제논리로 희생된 현대사의 수많은 '사건'들 중의 하나인 '4.3항쟁'은 그리하여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몇년 전 제주도에 갔다가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말로만 듣던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과 여러 기록들을 통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당시에 느꼈던 그 먹먹함을 다시 맛보아야만 했다.

빈한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져 있었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정서는 분노와 슬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를 살아냈던 작가의 슬픔은 철저히 절제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더 큰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

'섬사람'들을 차별하던 정권은 결국 살기 위해 산에 올랐던 이들을 '폭도'라는 이름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봉건시대에도 '버려진 땅'이었던 제주도는, 끝내 '이재수'로 상징되는 항거의 영웅이 있었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로 최후를 맞기는 했지만, 그는 제주도 사람들에게 당당한 '영웅'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4.3의 장두'였던 '이덕구'는 폭력적인 억압에 맞서 싸웠지만, 끝내 '폭도'라고 불려야만 했다.

나는 이덕구의 최후를 묘사한 다음 구절에서 소설의 제목이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68-69면)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그 숟가락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 지를 잘 알고 있겠지만, 언제 어느때라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항상 군복 상의에 지니고 다녀야만 했다.

4.3항쟁의 장두였던 그 역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이렇듯 초라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를 지켜보는'섬사람'들 역시 비감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소설 결말부에 '용머리 신화'에 대비되는 '말머리 전설'의 화소도 결국 제주사람들의 좌절된 꿈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육지의 '애기장수설화'와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는 '말머리 전설'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앞부분에 '4.3항쟁의 장두 이덕구'의 모습과 겹쳐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꿈이 실현될 때까지 여전히 '43항쟁'은 현재형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다른 한편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 가난했던 시절을 보내야 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작가가 살았던 그 시절만큼은 아닐지라도, 형제가 많아 월사금조차 제때에 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 기억, 그리고 질리게 먹어 남들은 별미로 먹는다는 수제비는 좀처럼 입에 대지 않는 나의 식성 등등...

정말 오랜 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련한 지난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2011년 12월 1일

* 안식년으로 캐나다에 머물 당시 썼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