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인문학에게 뇌과학을 말하다 VS 자유는 진화한다 조회수 : 3081
글쓴이 : 김보일 날짜 : 2010-10-06 10:53:00 추천 : 0



인문학에게 뇌과학을 말하다 VS 자유는 진화한다


자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볼까요. 당신은 지금 몇 시간째 컴퓨터에 매달려 중요한 워드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컴퓨터가 먹통이 됩니다. 다시 부팅을 해서 작업 중이던 파일을 불러보니 웬걸, 파일이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컴퓨터, 당신의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컴퓨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특정한 조건에서 컴퓨터는 다운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컴퓨터의 먹통, 즉 다운은 컴퓨터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컴퓨터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컴퓨터가 도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에게 ‘빌어먹을’이라는 욕을 해대며 마치 컴퓨터가 부도덕한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화가 나면 컴퓨터에게 발길질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컴퓨터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먹통’은 컴퓨터가 선택한 일이 아닌 특정의 조건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일’이었으니까요.

공사장에서 벽돌이 떨어져 당신의 머리에 부딪히는 상황을 생각해볼까요? 떨어지는 벽돌은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벽돌의 운동방향은 미리 결정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의 머리가 그 운동방향과 일치하는 곳에 놓여 있다면 당신의 머리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출혈은 ‘불가피한 일’이죠. 당신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벽돌을 집어 내동댕이치며 “망할 놈의 벽돌 같으니라고”하며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벽돌에게는 자신의 행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없습니다. 중력이 잡아끄는 길, 그 예정된 코스를 따라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렇게 되면 출혈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계를 둘러보세요. 떨어지는 나뭇잎도 역시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죠. 나뭇잎은 바람 속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 나뭇잎 역시 예정된 행로를 갈 뿐, 스스로의 행로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마치 혜성의 운동처럼 말입니다. 지구인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으로 지구를 비켜가는 혜성이 있다면 그것은 필히 혜성이 아닙니다. 혜성은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혜성을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겠죠.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라고 했습니다. ‘추구(芻狗)’는 고대 중국에서 제물로 만든 개 모형으로 제사 때는 존귀한 대우를 받다가 제사가 끝난 뒤에는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였죠. 천지가 만물을 ‘추구’로 여긴다는 것은 만물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논에서 농사일을 하고 나오는 농부가 번개에 맞아 죽는 일도 있습니다. 농사일을 하는 농부에게 번개를 내릴 수도 있는, 즉 농부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자연입니다. 번개는 농부를 ‘추구(芻狗)’쯤으로 여기는 것이죠. 먹통이 된 컴퓨터도, 출혈을 야기한 벽돌도, 영화 <아마겟돈>에 등장해 지구를 초토화시키는 혜성도 역시 ‘불인(不仁)’한 존재죠. 착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자연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선택의 여지, 이것이 곧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자유입니다. 먹통이 되느냐 마느냐를 컴퓨터가 선택할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죠.

그런데 여기 인간의 행위도 컴퓨터와 벽돌의 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도 마치 그 행동의 경로가 예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입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아니? 인간이 행동이 컴퓨터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상당히 거북살스러운 논리죠. 자, 차근차근 그들의 이론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1983년 벤저민 리벳이라는 신경과학자는 재미있는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실험은 아주 단순합니다. 실험의 대상이 된 피험자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립니다. 이때 피험자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체크되죠. 그런데 실험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험자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는 충동을 느끼기 전에 손가락을 들어 올릴 것을 알려주는 뇌 활동이 먼저(약 0.3초 전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행동을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전에 우리의 뇌가 이미 선택을 내렸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까요? 우리는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했다고 하지만, 즉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의 행동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뇌 기능이 만들어내는 착각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인문학에게 뇌과학을 말하다』의 저자, 크리스 프리스는 심지어는 자아라는 감각조차 착각이라고 주장합니다.

크리스 프리스의 발언을 직접 들어 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의 뇌가 선택을 내렸다. 따라서 그 순간에 우리가 선택한 것처럼 경험하지만 사실은 착각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면,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도 착각이다.” 내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 즉 자아마저도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거죠.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뇌의 신경세포를 자극해 얻는 반응의 일종이며, 상황에 대처하고 행동을 선택하는 이성적 사고라는 것도 뇌세포에 저장된 경험의 결합을 통한 반응일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뇌라고 하는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이러한 뇌과학자들의 파격적인 주장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론자들과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인간, 선택을 하도록 설계된 존재

인지과학과 철학계의 석학으로 꼽히는 대니얼 데닛 교수의 저서 『자유는 진화한다』는 이런 마찰의 한복판에 있는 책입니다. 데닛 교수는 자연과학의 유물론과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를 물질의 결정물만으로 바라보지도 않죠. 다시 말하면 데닛은 인간은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의지라는 것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과 결정론적 사유를 불편해하는 자유지상주의자 모두입니다. 그는 물리 세계는 인과관계에 따라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강한 결정론의 논리를 꼼꼼히 따져보며 균열을 찾아냅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양립가능성을 주장하는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함(inevitability)’과 ‘피할 수 있음(evitability)’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의 해제를 쓰고 있는 장대익 교수의 글을 길지만 인용해보도록 하죠.

“어떤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언제나 행위자에 대한 상대적 의미로 읽혀야 한다. 예컨대 바둑 프로그램을 생각해보자. 프로그래머는 컴퓨터가 어떤 수를 어떤 방식으로 둘지를 ‘결정론적’으로 설계한다. 즉, 모든 수는 이전 수들과 프로그램에 기반하여 정확히 예측될 수 있다. 만약 철수가 이 결정론적 시스템과 대결하여 내리 세 판을 이겼다고 해보자. 이 시스템의 패배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인가? 이 물음을 그 시스템에 하지 않고 그 시스템을 설계한 엔지니어에게 해보면 대답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엔지니어는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면서도 특정행동은 피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엔지니어는 인간의 육체를 지금의 모습처럼 있게 한 진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데닛은 자유의지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것은 유기체가 환경에 점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데닛은 설계자와 시스템의 이런 차이를 이해하게 되면 결정론이 ‘불가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결정론이 불가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론이죠. 열을 가하면 얼음은 불가피하게 녹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정론의 세계는 마땅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아니던가요? 강원도의 남대천에서 태어난 연어가 베링해협을 돌아 ‘불가피하게’ 자신이 태어난 모천인 남대천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결정론이 불가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구요? 정신을 차리고 데닛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겠죠.

데닛 교수는 말합니다.“물리적 수준에서는 예외 사례가 전혀 없는 반면, 설계 수준에서는 일반화에 예외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양립불능론자들은 ‘설계적 태도’로 설명되어야 할 것을 ‘물리적 태도’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데닛 교수는 주장합니다. 자연이 인간을 설계할 때 불리한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이죠. 인간이 자연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인간은 결정론적 존재이지만 특정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깃들 수 있는 여지가 남는 것입니다.

불리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능력, ‘회피 능력’은 사실상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부신 곳에서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은 자외선으로부터 시신경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회피 행위’일 것이고, 이물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나 구토 행위 또한 일종의 ‘회피 행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낯선 음식과 문화에 대한 이질감 또한 일종의 ‘회피 행위’로 볼 수 있겠죠.

데닛이 말하는 자유의지의 개념은 어떤 결과를 피할 수 있는 능력, 즉 ‘회피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회피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풍부한 영감을 줍니다. 우리의 몸에는 어떤 위기 상황에서는 어떤 상황을 선택하라는 프로그램만 내장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는 가능한 한 여러 가지 선택지들을 비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진화시켰다는 것이 진화론을 신봉하는 데닛 교수의 주장입니다. 데닛 교수는 인공지능학자 드레처의 구분법을 따라 전자를 ‘상황-행위기계’, 후자를 ‘선택 기계(choice machine)’라고 부르면서 인간은 자연계에서 최고 품질의 선택 기계라고 말합니다.

데닛 교수가 이 책에서 옹호하는 결정론은 모든 사건은 원인이 있다는 것이지 어떤 사건에 대한 어떤 결과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여러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거기에 자유의지의 존재가능성이 있게 되는 거죠. 데닛은 모든 사건에 원인이 있는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가능하다는 기존 결정론자들의 믿음은 잘못된 것이며 자유의지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그것이 우리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기에 중요합니다.

데닛 교수의 주장을 요약해보자면 인간은 불리한 상황을 회피할 수 있도록, 즉 선택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 500원짜리 동전과 1000원짜리 지폐가 있다고 할까요.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화폐의 가치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모두 1000원짜리 지폐를 선택할 것입니다. 왜? 답은 간단합니다. 1000원 짜리 지폐가 500원짜리 동전보다 가치가 높기 때문이죠. 가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보상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이겠고요. 1000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아이템이 500원으로 구입하는 아이템보다 더 많은 심리적 보상을 안겨줄 것은 분명한 일이겠죠.

그런데 만약 이런 선택 실험이 무인도에서 행해진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죠. 화폐를 통한 사회적 거래가 불가능한 곳에서는 화폐의 가치는 쓸모가 없습니다. 화폐의 사회적 가치가 제로인 무인도에서는 어쩌면 지폐보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동전이 훨씬 실질적인 사용가치가 높을 수도 있겠죠. 어떻든 인간의 선택은 가치가 높은 쪽으로 구부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가치와 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선택

많은 보상을 예측을 하고 어떤 행동을 선택했는데 막상 그 결과가 초라하다면 어떨까요. 예측에 실수가 있었고, 결국 기대했던 보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예측을 기대하고 했던 나의 행동은 특정한 사건과는 무관한,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겠죠. 반면 나의 행동의 결과 정확히 기대했던 보상이 일어나면 그 행동은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되겠지요. 이렇게 어떤 일을 예측하고 나의 행동을 선택할 때 우리는 더 많은 보상이 일어나는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은 더 많은 쾌락을 가져오는 쪽으로 그 경로를 결정합니다. 보상은 일종의 쾌락이니까요. 그런데 뇌과학자들은 이 쾌락이 단순히 심리적 만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쾌락이 ‘도파민’이라고 하는 신경전달물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를 ‘보상세포’라고 하는데, 이 보상세포는 동물이 음식이나 음료를 제공받은 뒤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탁월한 결정의 비밀』의 저자, 조나 레러는 도파민을 제거한 쥐들은 예측을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측이란 과거의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인데, 도파민을 제거한 쥐는 이런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죠.

상자 속에 비둘기를 가두고 막대기를 누르면 먹이가 굴러 떨어지게 하는 실험을 한다고 합시다. 우연히 막대기를 발로 눌렀을 때 비둘기에게 먹이가 제공됩니다. 처음에 비둘기는 먹기와 막대기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막대기를 누르는 행위에 먹이가 제공되는 일이 잦아지면 ‘먹이’와 ‘막대’가 하나로 묶여지는 이른바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막대는 곧 먹이라는 등식이 비둘기의 머리에 심어지는 것이겠죠.

『인문학에 뇌과학을 말하다』의 크리스 프리스는 말합니다. “뇌는 연합학습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도를 만들어낸다. 이 지도는 본질적으로 가치에 관한 지도다. 내가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가치 있는 대상이 어디 있는지,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낮은 가치의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준다.”라고 말합니다. A라고 하는 특정 장소에서 어떤 특정행동 B를 했을 때 보상 C가 주어지면 우리의 뇌는 A와 B와 C를 연합시키겠죠. 이때 보상 C의 절대치가 커진다면 A와 B는 긍정적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주위의 수많은 장소들과 선택가능한 행동들에 가치점수가 매기게 되죠. 결국 우리는 이 가치의 지도를 가지고 더 많은 보상을 기대하며 수많은 선택지들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겠죠.

그러나 여전히 의문입니다. 더 많은 보상을 좇아서 인간은 행동의 경로를 결정하기 마련이지만 그 보상의 기준이란 것이 천차만별이니까요. 소크라테스의 보상 기준과 돼지의 기준도 다르고, 보수파와 진보파의 기준도 다르고, 쾌락주의자와 금욕주의자의 기준도 다르고, 과학자와 종교인들의 기준도 다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