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인간 본성에 대하여 Vs 사회생물학과 윤리 조회수 : 2739
글쓴이 : 김보일 날짜 : 2010-09-30 12:02:00 추천 : 0



인간 본성에 대하여 Vs 사회생물학과 윤리


가까운 존재를 선호하는 인간의 타고난 성향

토끼를 잡아먹는 호랑이에게는 토끼는 한 끼의 먹을거리에 불과하겠지만 토끼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자신의 전부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전부, 우리는 그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모든 도덕은 생명을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합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생명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제외한 어떤 가치도 생명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생명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오직 생명밖에 없겠죠.

크기와 색깔과 모양에 관계없이 모든 생명은 동등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모든 생명을 우리는 동등하게 존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의 생명을 야생의 들개나 들고양이의 생명보다 중시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보편적 심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은 비늘을 가진 물고기보다는 사람이 속한 포유류의 생명을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실을 둘러보세요. 물고기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보다는 개나 고양이나 말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집에서 기르는 개와 고양이가 들개나 들고양이보다 인간과 ‘가까운 존재’이니만큼, 가까운 존재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죠. 우리가 가족의 죽음을 다른 사람의 죽음보다 슬퍼하는 것도 ‘가까운 존재’의 논리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겠죠. 가까운 친구, 가까운 친척, 가까운 이웃의 고통에 우리는 민감한 경향을 가지고 태어났죠.

모든 동물들도 ‘가까운 존재’를 선호하는 경향을 타고났습니다. 닭도 제 새끼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솔개 앞에서 겁을 상실합니다. 새끼에게 끌리는 본능이 솔개에 대한 두려움의 본능을 압도하는 거죠. 친족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경향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이 타고난 성향일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들과 딸을 사촌 조카보다 더 좋아합니다. 친족은 피를 나눈, 다시 말하면 유전자를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친족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나와 유전자를 더 많이 공유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나와 유전자의 공유 정도가 높은 사람은 가까운 친척 ‘근친(近親)’이라고 할 수 있고, 먼 친척은 ‘원친(遠親)’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가족은 유전자의 공유정도가 높은 근친입니다. 또 포유류는 물고기에 비해서 사람과 유전자의 공유정도가 높으니 물고기보다는 포유류가 사람보다 근친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풀과 물고기 중에서 사람과 유전자의 공유정도가 높은 존재는 누구일까요?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물고기죠. 물고기는 사람처럼 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장 속에는 사람처럼 붉은 피가 흐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물고기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는 일을 주저합니다. 왜일까요?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생명을 해치는 일은 옳지 않다는 어떤 직감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지 않을 거라는 생각, 바로 그것이 도덕적 직감입니다. 왜, 그것이 옳지 않느냐고 물으면 막상 논리적으로 대답하기 어렵지만 왠지 그 일이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생각, 바로 그것이 도덕적 직감이죠. 우리는 그 도덕적 직감으로 풀을 베는 것은 그른 일이 아니지만 물고기의 배를 가르는 일은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도덕적 직감으로 애완견을 먹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소고기를 먹는 일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우리는 ‘나’와 유전자의 공유정도가 높은 존재, 즉 근친성이 높은 존재에게 더 이끌리는 경향성을 타고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에도 함정은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가 높은 존재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친구는 사돈의 팔촌보다 유전자의 공유정도가 높지 않은데도 나는 그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움을 느끼고, 내가 애지중지하는 난초는 들개보다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가 낮은데도 나는 난초의 향기에 취하며 난초를 군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친구나 난초에 대해 끌리는 성향은 생물학적 개념 즉, 혈연적 근친성의 개념으로 설명이 안 되죠.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매체인가?

그런데 여기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의 행동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을 내놓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생물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에드워드 윌슨이죠. 그는 1956년부터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20여권의 명저를 저술한 세계적인 과학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1975년에 발표한 『사회생물학(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이란 책은 무려 2,000개가 넘는 참고문헌과 50만 단어 이상을 함유하고 있는 실로 방대한 저서죠. 그의 책을 읽는 작업은 과학과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몹시 괴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이 글은 그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보자는 데 있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호랑이에게 돌아가 이렇게 물어볼까요. “너는 왜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하지?” 호랑이가 입[생각]이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고 살려고.”, 다시 호랑이게 이렇게 물어볼까요. “왜 먹고 살려는 거지?” 바로 이럴 때 호랑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왜 살려고 하는 걸까?’ 호랑이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곧바로 대답을 내놓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왜 가치가 있느냐고 물어서는 안 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먹이가 가치가 있는 것은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생명은 무엇을 위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죠.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가축들의 생명을 헤치고 있지만 말입니다. 어떻든 생명은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일 수 없고,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런데 사회생물학자 윌슨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는 “유기체는 스스로 생존하지 않는다.유기체의 일차적 기능은 다른 유기체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것이며 유기체는 일시적인 매개체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유기체, 즉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주 혁명적인 생각입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은 생명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윌슨의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보다 높은 가치? 윌슨은 그것을 유전자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어떤 윤리학도 생명체에게 요구하고 명령할 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없었죠. 생명은 지존(至尊)의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윌슨의 사회생물학에 와서는 가치의 관계가 바뀝니다. 이제 인간과 생명의 주인은 유전자, 즉 DNA로 바뀝니다. 윌슨은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복제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개체란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고, 자손 대대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전자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매체에 불과하다는 거죠. 생명이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윌슨의 혁명적인 생각은 수많은 논쟁을 불러왔고, 그 논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뜨겁게 진행 중입니다.


개체의 복지에는 관심도 없는 이기적 유전자

윌슨의 제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자라는 책에서 윌슨의 주장보다 더 도발적인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그 기계의 목적은 자신을 창조한 주인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라는 말이다. 그러니 유전자는 얼마나 이기적인가.”라는 주장이 그것이죠.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유전자는 인간의 복지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고, 오직 유전자의 증식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죠. 어떤 이들은 『이기적 유전자』의 책 제목만 보고 인간에게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본성이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책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잘못 간파한 오류라고 할 수 있죠. 다시 말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의 제목은 유전자가 인간이라는 개체의 복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 증진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개체는 불안을 느끼는 성향을 타고 났고, 어떤 개체는 불안을 느끼는 성향을 전혀 타고 나지 않았다고 해볼까요. 이 두 개체 중에서 진화에 유리한 쪽은 어떤 개체일까요? 개체의 복지 측면에서 보면 당연히 불안이 없는 개체가 나을 것이지만,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안을 느끼는 개체가 훨씬 더 유전자 증식에 도움이 되는 개체입니다. 바로 이런 진화론적 이득이 있기 때문에 유전자는 불안을 느끼는 인간을 설계했다는 것이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사회생물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행동이 종의 유전적 구성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이죠. 그리고 그 결정에는 개체의 복지가 고려되지 않고, 오직 유전자의 증식논리만 고려된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라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입니다.

도킨스의 논리대로라면 아마도 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솔개와 싸우는 닭의 행동이 “너의 개체를 희생할지라도 너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너의 새끼를 위해 솔개에게 대항하라.”라는 유전자의 들리지 않는 메시지에서 나온다고도 설명할지도 모릅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의 설명대로라면 위대한 인간의 모성도 유전자의 명령에 불과한 것이 되죠. 윌슨은 인간의 인격적 특성, 즉 의지와 열정과 지성조차도 유전자의 명령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고귀함을 증거해주는 수단인 인간의 주체성과 지성과 창조성, 심지어는 종교성마저도 유전자의 자기증식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적 가치로 전락해지고 말죠. 사회생물학자들의 생각에 종교계가 발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생물학은 서로 사랑하라는 신의 논리보다 ‘퍼지고 번성하라’는 DNA의 논리를 우위에 두는 발상의 산물이니까요. 윌슨은 “인간의 마음은 생존과 생식을 위한 장치이며 이성은 단지 그 다양한 기술의 하나일 뿐”이라면서 정신과 이성도 유전자의 생존과 증식에 봉사하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피터 싱어가 말하는 공평무사성의 원리

『사회생물학과 윤리』에서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는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이익이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타인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즉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의 사회가 여러 사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좀 더 확대된 시각에서 볼 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이익이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라는 것이죠. 내가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싫다면 피부색,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타인들 또한 싫어한다는 것이죠. 피터 싱어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공평무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앞서 언급했듯이 가까운 존재에게 끌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성향에 이끌리는 행동은 도적적인 행동은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이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이성과 의지의 산물이어야 합니다. 양이 풀을 뜯는다고 해서 양을 평화의 존재로 규정하고, 육식 동물은 다른 동물을 먹이로 삼는다고 해서 악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단지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옛날이야기에서나 가능한 법이죠. 윤리학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선택된 행동만을 대상으로 하니까요.(그런 점에서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윤리학의 뿌리를 흔드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타고난 성향을 극복하고 이성으로써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피터 싱어는 모든 이익은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고통을 피하고, 능력을 개발하고, 먹고 자는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과 우정과 애정을 즐거이 교환하고, 타인들로부터 불필요한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의 계획을 자유로이 추구하는 이익”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고려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흑인이기 때문에 차별받아야 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받아야 한다,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차별받아야 한다고 할 때, 작동하는 것은 ‘응분의 원리’입니다. 어떤 행동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는 논리가 응분의 원리죠. 바로 이 응분의 논리가 형벌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죄질이 다르면 다른 만큼 거기에 해당하는 형벌이 주어져야 한다는 논리가 응분의 논리죠. 이 응분의 논리는 차별의 논리로도 작동됩니다. 피부색, 성별, 나이나 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논리도 따지고 보면 ‘다르면 다르게 대우하라’는 응분의 논리가 작용한 셈이니까요.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죄를 저지르면 형벌을 주는 것에는 정당한 응분의 원리가 작동했다고 할 수가 있지만 피부색이나 성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는 그릇된 응분의 원리가 작용한 것이겠죠. 왜일까요?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피부색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성별도 결정할 수가 없구요. 내가 결정하지도 않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이처럼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내가 키가 작고, 코가 작다는 것, 그것은 내 이성과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인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불공평하게 대우받는다는 일은 이만저만 억울한 일이 아니겠죠. 유전자가 우리의 외모와 성격을 결정하지만 우리는 유전자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내 책임 밖의 것입니다.(심지어 싱어는 모든 동물이 동물로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므로, 동물로 태어났다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논리는 나중에 동물해방의 논리로도 발전하게 되지요.)

그러나 찬찬히 생각하면 나의 외모는 나의 유전자가 결정하더라도 내 성향까지도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하기가 곤란합니다.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느냐, 부자집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나의 성향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만약에 모든 것을 유전자가 결정한다면 한 사람의 성격은 그가 소속된 계급이나 집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하는 사회학은 설 자리를 잃고 말겠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의 현상을 유전자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은 자신의 방법론 이외의 학문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유전자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 여전히 혼란스러운 존재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도 유전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험을 통해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이 조금씩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 남성들에게 선택하게 할 때, 대다수 남성은 허리가 엉덩이 크기의 10분의 7에 해당하는 여성을 선호한다는 것이죠. 그들은 허리 대 엉덩이 비율이 0.7에 해당하는 여성이 아기를 더 잘 낳고, 더 어린 나이에 임신이 가능하며 유산도 더 적게 한다는 데이터를 이 실험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 실험이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S 라인의 허리 굴곡을 가진 사람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심리의 배후에는 ‘퍼지고 번성하라는’ DNA의 논리가 작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 중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만큼 해명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독일 최고의 신진 철학자 리하르트 D 프레히트는 그의 책 『사랑,그 혼란스러운』에서 진화생물학과 뇌과학,문화인류학적 연구 결과를 아우르면서 "사랑은 DNA나 호르몬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심리에서 나온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을 컴퓨터 단층 촬영이나 호르몬 작용으로 증명하는 행위는 '전등 스위치를 가지고 빛을 규명하려는' 시도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랑은 불가능해 보이고 특별하고 부서지기 쉽고 위협받기 쉬운 어떤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사회생물학자 혹은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심리를 유전자의 입장으로 말끔하게 설명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바람일 뿐이지, 인간의 심리만큼 복잡다단한 것이 없지요. 이론은 군더더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론은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말끔한 이론을 제기하려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복잡한 굴곡과 변수들이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