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는 왜 가로줄을 보지 못할까? Vs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 조회수 : 3573
글쓴이 : 김보일 날짜 : 2010-09-24 16:11:00 추천 : 0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는 왜 가로줄을 보지 못할까? Vs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와 진짜 세계는 같은가?

우리는 세상이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삼각형은 세모난 채로 존재하고, 사각형은 네모난 채로 존재하며, 원은 둥근 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죠. 우리가 삼각형을 인식하는 것은 실제로 삼각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또한 꽃에게는 꽃의 ‘향기’라는 실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비로소 냄새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것, 우리는 그것을 감각이라고 부르죠. 감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내 앞에 있음을 알죠. 물론 ‘환각(幻覺)’이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환각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감각을 부인하지는 않죠. 내 앞에 찬 물이 뚝뚝 흐르는 얼음이 있고, 그 얼음을 삼켰을 때 입안이 얼얼해지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면 우리는 얼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왜일까요?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감각의 선명함을 부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지금 당장 자신의 볼을 한번 꼬집어볼까요. 분명하게 느껴지는 아픔, 그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죠. 그 아픔의 선명성 때문에 아픔의 존재를 부인하기가 어려운 거죠.

그러나 꿈은 어떤가요? 꿈은 대개 몽롱합니다. 칼라 꿈도 있긴 하지만 감각의 선명도라는 면에서 볼 때 꿈은 현실보다 해상도와 선명도가 크게 떨어집니다. 그러나 꿈이라고 해서 해상도와 선명도가 마냥 떨어진다고만은 볼 수 없어요. 어떤 꿈은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아 보일 때가 있으니까요.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죠. 이게 꿈일까 현실일까?

장자(莊子)는 바로 그런 고민에 빠졌던 사람입니다. 『장자(莊子)』라는 책의 ‘제물론(齊物論)’이 전하는, 장자가 꾼 꿈의 내용은 이런 것이죠.

"나(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니 어디로 보나 나비였다. 나는 나비일 줄로만 알고 기뻐했다. 꽃도 구경하고 들도 구경했다. 한참 날아다니다가 보니 어떤 나무 밑에 한 사람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려가 보니 바로 장자 자기였다. 그때 꿈이 깨었다.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이었다. 지금 나는 깨어났고 나는 틀림없는 다시 내가 되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분명히 나는 나비였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사람으로서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나비인데 사람이라고 꿈을 꾸고 있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비꿈, 한자로 풀어서 ‘호접몽(胡蝶夢)’을 두고 어떤 이들은 장자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호접몽은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죠.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와 진짜 세계는 같은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설탕 속에는 과연 단맛이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일본의 인지과학계의 선구자로 꼽히는 다카기 마사유키의 책은 아주 긴 제목을 가졌죠. 책 제목은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는 왜 가로줄을 보지 못할까?』입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문제는 일찍이 철학자 조지 버클리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버클리는 『인지원리론』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죠. “색과 맛은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물질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감각적 성질은 물질 속에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설탕이 우리들의 혓바닥에 부여하는 달콤한 감각적 성질이 설탕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콧방귀를 뀔 수도 있겠죠. 그러나 철학은 말장난이 아니죠. 그것이 말장난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것이 우리의 상식을 뒤엎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이 책의 한 구절을 볼까요. “고양이는 설탕을 핥아도 달다고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설탕에는 달다는 성질이 없다. 즉 맛이 단 설탕이라는 물질은 없으며 그냥 설탕이 있을 뿐이다.(중략)외부세계에 있는 것은 설탕 분자일 뿐이며, 여기에 단맛이 묻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양이가 설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달다는 감각을 대뇌에서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때요? 이쯤 되면 버클리의 “물질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감각적 성질은 물질 속에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얼마나 탁월한 통찰의 결과인지를 알 수가 있겠죠.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단맛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의 입 안에서 그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로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논리죠. 존재하는 것이 ‘색(色)’이죠. 바로 우리 입 속에 존재하는 ‘단맛’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바로 ‘공(空)’입니다. 허공처럼 텅 비어 있는 것 말입니다.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는 왜 가로줄을 보지 못할까?’라는 물음도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불교적 세계관이 헛된 믿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책은 실제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코린 블랙모어 교수의 연구실에서 고양이를 대상으로 행해졌던 실험을 소개합니다.


세로줄 무늬의 방에서 길러진 고양이는 왜 가로줄 무늬를 보지 못할까

연구실은 아주 어두운 방입니다. 고양이들은 하루 중 22시간을 이 방에서 보내고, 2시간은 세로 줄무늬가 그려진 밝고 작은 방으로 나와서 앉아 있게 됩니다. 고양이들은 자기 몸의 무늬를 알아볼 수 없도록 목에는 검은 후드를 달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양이들에게 보이는 것은 밝고 작은 방의 세로 줄무늬뿐입니다. 그 고양이들은 어떤 가로선도 본 적이 없죠. 이 고양이들을 높이 1미터 정도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닥에 가로선이 그려져 있는 플라스틱 판을 깔아놓고 고양이를 밀어서 떨어뜨리려고 한다면 고양이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답은 “절대로 뛰어내리지 않는다.”입니다. 그렇다면 책상의 방향을 수평으로 90도 회전하여 바닥의 가로선을 세로선으로 바꾸어 놓고 고양이를 밀어서 떨어뜨리려고 한다면 고양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고양이는 낙법(落法)의 달인(?)입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로선이 그려져 있는 바닥으로 낙하를 시작하죠.

가로줄 무늬만 있는 방에서 사육된 고양이는 세로줄 무늬를 볼 수가 없고, 그래서 바닥의 세로줄 무늬를 어둠으로만 인식하게 되고, 세로줄 무늬만 있는 방에서 사육된 고양이는 가로줄 무늬를 볼 수가 없기에 바닥의 가로줄 무늬를 어둠으로 인식한 결과라는 것이 이 실험에 대한 저자의 설명입니다. 저자는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블랙모어 교수의 실험에 참가한 고양이들의 뇌 활동을 잘 살펴보면, 이 고양이들은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든 각도의 선을 다 보았다. 그런데 세로줄 무늬밖에 보이지 않는 환경에서 다섯 달을 보내자, 가로줄 무늬에 반응하는 뇌세포는 거의 사라지고 세로줄 무늬에 반응하는 뇌세포는 늘어났다. 이것은 근육의 경우와 비슷한데, 사용하지 않는 근세포 수는 줄어들고, 그 근육은 가늘고 약해진다. 반면에 자주 사용하는 근육은 근세포 수가 늘어나고, 두껍고 강해진다. 뇌세포도 이와 마찬가지로, 가로 줄에 반응하는 뇌세포는 몇 개월이나 사용하지 않아 그 수가 줄어들었으므로, 가로 줄 정보가 들어와도 그것을 거의 느낄 수 없게 된다.”



세로줄 무늬만 있는 방에서 양육된 고양이에게는 가로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그 가로줄은 정상적인 시지각을 갖춘 인간에게는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고양이게는 ‘없는 것’이 인간에게는 ‘있는 것’이 되는 거죠. 마치 ‘단맛’이 인간에게는 있지만 고양이에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죠.


보이는 것만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아론적(唯我論的) 사고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예는 현실에 비일비재하죠. 지금은 누구도 전기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원시시대만 해도 전기의 존재를 믿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빨간 색이 먼저 있기 때문에 빨간 사과가 나의 감각에 포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는 왜 가로줄을 보지 못할까?』의 저자는 철학자 조지 버클리의 “물질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감각적 성질은 물질 속에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오히려 세계의 실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빛은 투명할 뿐인데 그것이 우리의 뇌에 ‘붉은 색’이라는 느낌을 만들어 낼 뿐이라는 것이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빨간 색의 사과를 모두가 예외 없이 빨간 색으로 느끼지는 않는다는 거죠. 빨간 색을 바라보는 주체를 인간에서 동물에게까지 확장하면 ‘빨간 색의 사과를 모두가 예외 없이 빨간 색으로 느낀다.’라는 가설은 금방 그 토대가 허물어집니다. 왜일까요? 저자의 말을 들어볼까요. “소는 색이라는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또한 꿀벌에게는 자외선이 보이지만, 인간은 자외선을 감지하는 시세포가 없어 자외선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자외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겠죠. 그러나 자외선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내가 보는 대로 세상은 존재한다고 생각하죠.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커 보이고 먼 데 있는 것이 작아 보이기 마련이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아이들은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주관적 성향이 다분합니다. 이런 경향을 철학에서는 유아론(唯我論) 또는 독아론(獨我論)이라고 하죠.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세계는 '주관'에 나타나는 관념에 불과하다는 ‘주관적 관념론’이라고도 합니다. ‘나[我]’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바로 유아론입니다. 극단적인 유아론자라면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내 눈에 비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겠죠. 그러나 세계에는 나의 감각기관에 포착되지 않는 초음파도 있습니다. 박쥐는 그 초음파를 감지하는데 인간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죠. 이렇게 되면 박쥐에게는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국물이 든 그릇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주죠. 그 그릇을 받아든 아이는 “앗 뜨거워!”라고 말합니다. 엄마는 뜨겁지도 않은 것을 받아들고 뭐 그렇게 호들갑이냐며 아이를 나무랍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저의 생각은 엄마입니다. 나에게 뜨겁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뜨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세계는 내가 보고 느끼는 대로 존재한다는 유아론이 바로 이것이죠.


꽃향기는 사람에게는 ‘있고’, 진드기에게는 ‘없다’

'SF 영화로 보는 철학적 물음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조용헌의 책,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는 ‘있음’과 ‘없음’, 인식과 존재의 문제를 일관되게 조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진드기의 감각세계를 말합니다. 온혈동물의 피를 먹고사는 진드기가 온혈동물을 감지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피부의 지각세포입니다. 그 세포는 포유동물의 몸에서 나는 탄소 냄새에만 반응합니다. 물론 식물의 냄새, 빗물 소리, 바람 소리, 새의 노랫소리 등등 진드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진드기에는 이런 다양한 세계는 의미가 없죠. 포유동물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체온과 피부의 접촉 자극이라는 세 가지만이 진드기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죠. 꽃의 향기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어도 진드기에게는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죠. 진드기와 인간이 객관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죠. 1957년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을 쓴 야곱 폰 웩스쿨은 객관적 세계를 의미하는 ‘벨트(Welt)’와 구분지어서 각각의 동물이 경험하는 감각의 세계를 ‘움벨트(Umwelt)’라고 명명한 바 있지요. 인간은 자신이 감각한 세계를 객관적 세계 즉 ‘벨트(Welt)’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각의 세계, 즉 ‘움벨트(Umwelt)’라는 것이지요.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면 인간에게는 초음파가 없고, 박쥐에게는 초음파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초음파가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있다고 말할 수가 없겠죠. 초음파를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만 초음파는 존재하고, 초음파를 느낄 수 없는 존재에게 초음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초음파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벨트(Welt)’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동물에게만 존재하는 ‘움벨트(Umwelt)’라는 것입니다.

철학서임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는 풍부한 자연과학적 사례를 들어 철학적 명제를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개미를 속이기 위해서는 구태여 형태를 닮을 필요는 없다. 냄새를 흉내 내면 된다. 개미는 단지 냄새로만 가족, 즉 동료개미를 인식하는데 이 냄새는 몸 표면에 있는 약간의 탄화수소로 이루어진 혼합물일 뿐이다.” 라고 저자는 말하면서 불개미의 애벌레의 냄새를 위장해 불개미로부터 보호와 양육을 받는 반날개딱정벌레의 생태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개미의 세계는 냄새로만 만들어진 움벨트라는 거죠. 동물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시각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후각중심적 세계를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덧붙입니다.

저자는 ‘본다는 것은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후천적인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는 왜 가로줄을 보지 못할까?』라는 책이 가지는 문제의식과 견해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죠. 저자는 옥사이드 팽(Oxide Pang) 감독의 홍콩영화 <디아이 The Eye>(2002)의 주인공의 사례를 들어, 시지각을 갖추는 것이 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윙카 문은 두 살 때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스무 살 때 각막이식 수술을 받고 시력을 되찾게 되죠. 그러나 수술을 하고 붕대를 푼 날 가장 먼저 본 건 검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윙카 문이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 혹은 ‘가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와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력을 회복한 윙카 문이나 ‘세로줄 방에서 자란 고양이’나 시지각은 멀쩡합니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 기관이 멀쩡하다는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시력을 잃은 윙카 문의 세계에서 시각은 없는 감각입니다. 이때 윙카 문의 움벨트를 구축하는 것은 시각을 제외한 감각입니다. 그 움벨트의 세계 속에서 윙카 문은 큰 문제없이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자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시각의 세계가 그가 지금까지 구축한 움벨트의 세계를 흠집 내기 시작한 것이죠. 윙카 문은 혼란스럽습니다. (시각을 되찾은 자의 혼란을 옥사이드 팽 감독은 스릴러 장르라는 영화적 관습으로 잘 녹여내고 있지요.) 혼란스러운 윙카 문은 결국 다시 실명(失明)을 택합니다. 눈을 뜬 세계보다 지금까지 살아온 ‘눈먼 세계’가 안락하다고 느껴서였겠죠. 세로줄 무늬의 고양이가 탁자 위에서 바닥의 가로줄 무늬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과 시각을 되찾은 윙카 문의 공포감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물은 지각됨으로써 비로소 우리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지각과는 상관없이 어떤 사물은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감각만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일 년 내내 불 곁에서 일하는 대장간의 움벨트가 있다면 반대로 일 년 내내 추위 속에서 일하는 얼음 창고 노동자의 움벨트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만의 움벨트만이 이 세계의 실상과 일치한다고 우길 때, 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