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떡갈나무 바라보기 Vs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조회수 : 2636
글쓴이 : 김보일 날짜 : 2010-07-06 18:00:00 추천 : 0



떡갈나무 바라보기 Vs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왜 하나의 사물과 현상이 제각각 달라 보일까?

각인각색(各人各色)이란 말이 있죠. 사람들은 저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취향이나 성격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각인각색이라는 이 단순한 명제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지요. 나는 이렇게 보는데, 너는 왜 그렇게 보느냐는 식의 분쟁이 얼마나 자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지요. 대체 왜 똑같은 사물이나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달리 보이는 걸까요? 사물이나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보인다면 분쟁은 훨씬 더 줄어들 터인데 말입니다.

‘타자(他者)’란 나와 감각기관을 공동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나의 감각기관을 빌려 세상을 봅니다.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감각기관과 나의 감각기관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보고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바로 이 단순한 사실에 일차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펜탁스라는 사진기로 찍을 것인가, 미놀타로 찍을 것인가에 따라서, 또 어떤 필름을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서 사진의 색감과 느낌이 달라집니다. 렌즈가 달라지면 사진이 달라지듯 감각기관이 달라지면 감각 내용 또한 달라지겠죠. 물론 코끼리를 개미로 인식하는 차이는 없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분쟁이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작은 차이를 간과할 수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욕망이 제각각이라면 사물에 대한 개인들의 해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이 크게 보일 수 있는 거겠죠.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사랑에 바진 사람에겐 빵보다 커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은 이렇게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지 않습니다. 내 감각기관에 의해서 굴절되고, 내 욕망에 의해서 굴절된 사물을 보게 되는 것이죠. 사물과 현상을 받아들일 때, 그 굴절이 심한 경우를 두고 우리는 주관적 판단이라 하고, 그 굴절이 약한 경우를 두고 객관적 판단이라고 합니다. 나 자신은 명석한 객관적 판단의 소유자라고 아무리 뻐기는 사람도 사물이나 현상을 일체의 굴절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온전한 객관성의 실현, 그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자라면 꼭 한번 도달하고 싶은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하지만 우리가 쓰고 있는 저마다의 안경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미세하나마 나의 색(色)이 있고, 굴절률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그 색과 굴절률만큼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움벨트, 동물의 감각 세계와 인간의 감각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인식의 상대성을 풍부한 사례들을 동원하여 친절하고도 쉽게 말해주는 책이 있습니다. 주디스 콜과 허버트 콜이 같이 지은 책, 『떡갈나무 바라보기』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책의 부제는 ‘동물들의 눈으로 본 세상’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아닌 동물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어떨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이죠.

5백만개의 후각세포를 가진 인간이 바라보는 세상과 1억 2천 5백만∼3억개의 후각세포를 가진 개가 바라보는 세상은 같을 수가 없겠죠. 인간과 개가 느끼는 세계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움벨트(Umwelt)’라는 용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957년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을 쓴 야곱 폰 웩스쿨이 만든 이 용어는 동물이 경험하는 주변의 생물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움벨트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경험이 아니라 개개의 동물에게 특유한 경험을 일컫죠. 예를 들어 푸른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붉은 렌즈를 끼고 바라보는 세상이 있다면 그 두 세계는 같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 각각의 세계를 ‘움벨트’라 명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확대해 본다면, 각인각색(各人各色)이라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체수만큼의 움벨트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어떤 독재자가 나타나 내가 보는 세계, 즉 나만의 움벨트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논리는 매우 위험한 논리라고 말할 수가 있겠죠. 이런 위험한 논리는 역사상에서 보면 매우 흔하게 나타났습니다. 나의 종교만이 옳고, 나의 세계관만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얼마나 많은 비극적 사태를 야기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나와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논리를 무한 확장하려는 논리가 제국주의의 논리가 아니었던가요? 백색의 피부는 문명이요, 흑색의 피부는 야만이라는 논리 또한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를 야기하지 않았던가요? 나를 세계의 중심으로 삼고, 타자를 변방의 오랑캐라고 야만시했던 논리가 중화주의의 논리가 아니었던가요? 그것은 분명 포용의 논리가 아니라 배제의 논리요, 폭력의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는 선이요 너희들은 악이니 선의 논리로 악의 논리를 깨부수어야 한다는 테러리즘의 논리요, 유혈(流血)의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떡갈나무 바라보기』는 동물의 생활 리듬, 사회 세계, 공간, 시간 감각 등 다양한 움벨트를 설명해 줍니다. 일백 년 가까이 사는 거북이와 하루밖에 못 사는 나방은 서로 다른 움벨트 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진드기의 움벨트입니다. 진드기는 포유동물의 따스한 피에 알을 낳습니다. 눈이 없고 귀도 없는 진드기는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토끼나 다람쥐 등 포유동물이 지나가는 순간 포유동물의 몸에서 발산하는 부티르산의 냄새를 감지해 포유동물의 몸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로스토크 연구소에는 무려 18년 동안 굶주린 채 나무에 매달려 살고 있는 진드기가 있다고 합니다. 18년 동안 한 곳에 매달려 있는 진드기의 시간과 조금의 지루함도 참지 못하는 인간의 시간 감각은 같을 수 없겠죠. 또 인간은 1초에 18개에서 24개의 이미지를 지각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의 ‘나이프피시’라는 물고기는 1초 동안 1,600가지의 전기충격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공간의 개념도 동물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소금쟁이의 세계를 한번 보도록 하죠. 소금쟁이의 세계는 2차원적이라는 것입니다. 소금쟁이를 잡아서 어항에 담아두고 관찰하면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물체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수면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짚신벌레는 앞이나 뒤 또는 오른쪽이나 왼쪽을 구별할 수 없는 공처럼 방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더러 방향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수나방은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나방을 아주 희미한 냄새를 따라가 만나 짝짓기를 하고, 돌고래도 160km나 떨어져 있어도 암수가 대화를 하여 만날 수 있습니다. 개구리는 파리와 같이 움직이는 물체는 잘 파악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인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특정 지점을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의 수를 세는 데 이용되는 광전지를 발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방울뱀의 눈 바로 아래 있는 움푹 파인 기관에는 15만개의 온점(온도를 느끼는 감각기관)이 있는데 방울뱀은 이 기관으로 섭씨 1도를 몇십 등분한 정도의 미세한 차이가지도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피부 1제곱센티미터당 열을 감지하는 3 개의 온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뱀과 사람이 보는 세계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동물이 저마다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동시에, 공간은 동물의 경험을 둘러싸는 틀이 된다. 그것이 움벨트의 특징입니다.


장자(莊子), 차이를 배려하는 철학

동양 고전 『장자(莊子)』와 관련하여서는 수많은 출판물들이 있지만 『장자(莊子)』를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집요하게 조명하고 있는 책은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장자(莊子)』의 한 구절을 예로 들면서 장자의 철학이 어떻게 타자를 발견하고,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것인가를 고심한 철학임을 역설합니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장자』, 「소요유(逍遙遊)」

송나라 사람에게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주는 것이 모자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월나라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쓸모 있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이치, 바로 이것이 타자성이요, 상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이 “피레네 산맥의 이쪽에서는 진리가 저쪽에서는 오류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진리의 상대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말이겠죠. 저자는 이 우화에 등장하는 송나라 사람이 “차이 속에 머물며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나 자신만의 생각에 머물지 않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운동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이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와 토론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와 토론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공동체의 규칙을 집단적으로 재확인하려는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소통은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줄이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나와 내 집단만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의견을 재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자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의타적인 존재들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란 늘 누군가와 부딪히는 접촉과 접속의 연속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의 저자는 『장자』의 한 구절을 예로 들면서 타자와 어떻게 대면해야 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장자』, 「지락(至樂)」

우리는 노나라 임금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자주 봅니다. 개를 아예 짖지 못하도록 성대를 제거하면서도 그들은 그 불쌍한 동물을 ‘애완견’이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방식대로 개를 사랑하는 일종의 소유 방식의 사랑이겠죠. 그런 소유 방식의 사랑에 타자에 대한 배려는 일체 없습니다. 오직 내가 속한 공동체의 규칙만을 되풀이하는 배타적 논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 바로 이것이 유아론(唯我論)입니다.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라는 태도죠. 다시 말한다면 나만의 ‘움벨트’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진리의 유일한 척도라고 생각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비유하건대 나의 애완견에게 “나에게는 냄새가 나지 않는데 너는 냄새가 난다고?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라고 언성을 높이는 태도라고도 하겠죠. 이런 경우 말을 못하는 개만 억울합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신의 방식을 타자[새]에게 강요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욕망을 배제하는 제국주의적 방식입니다. 장자를 말하는 강신주의 또 다른 책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 저자는 위의 『장자』의 「지락」의 구절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하나라는 생각은 위험하지요.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에 복속시켜야 하니까요. 사랑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로서의 타자를 인정해야 합니다. 타자는 내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이요, 사랑은 나와는 다른 세계를 끌어안는 것이지, 나의 세계를 확산시키려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닷새가 가진 삶의 규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공중을 날며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는 자유겠죠. 장자는 이 자유를 인위성이 제거된, 있는 그대로의 새의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새를 가만 놔두면 새가 알아서 한다. 새가 알아서, 새의 규칙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이 새에 대한 사랑이지, 내 방식을 새에게 강요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편견에 갇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레네 산맥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쪽의 문화와 전통에 사로잡혀 있고, 피레네 산맥의 저쪽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문화와 전통에 사로잡혀 있겠죠.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식의 소유자라면 이 차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중으로 한번 날아올라 차이의 세계, 즉 땅의 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북쪽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와 치수는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었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장자』, 「소요유(逍遙遊)」

바로 이 대붕이 피레네 이쪽과 저쪽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내가 속한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라고 주장하는 속 좁은 밴댕이가 아니라, 높고 낮음과 평평함과 울퉁불퉁함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합니다. 무엇에도 얽매임과 걸림이 없는 존재 말입니다.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제가 속한 문화적 규칙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 그야말로 ‘대자유인’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 잘리고, 옻나무는 쓸모 있어 베인다. 표범은 그 아름다운 털가죽 때문에 재앙을 맞는다.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어도,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르고 있구나. -『장자』, 「인간세(人間世)」

돈[이익]이 되면 쓸모가 있고, 이익이 안 되면 쓸모가 없다. 이것이 돈의 논리, 자본의 논리입니다. 현명한 사람도 이 논리 앞에서 장님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좋은 음악가도 이 논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되면 장사꾼밖에 되지 않습니다. 장자의 논리는 초월의 논리입니다.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는 속박의 논리가 아닙니다. “일류대학? 나 그런 것에 관심 없어. 난 학문 그 자체가 즐거울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초월의 논리를 말한 셈입니다. 초월은 어려운 곳에 있지 않습니다. 돈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초월의 삶을 이미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사랑이란 그 초월의 삶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