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죽음의 기차를 타고 조회수 : 3152 별점
글쓴이 : 문차일드 날짜 : 2007-03-13 추천 : 0

| |

자국의 유독성분의 산업폐기물을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선진국, 쓰레기더미 위에서 생존을 위협받으며 생존해나가는 세계 각지의 구석진 곳의 아이들, 마약에 취한 채 내전에 끌려가 살인기계와 총알받이가 되는 아프리카 아이들, 갓 10대가 되어서 결혼해 노예처럼 살다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인생편력을 가진 소녀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카카오 농장에서, 카펫을 짜는 공장에서, 양귀비꽃밭에서 쉴 새 없이 손을 놀려야하는 짙은 피부색의 작디작은 아이들... 제 3세계에 빛과 어둠을 동시에 드리우는 세력권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엔리케의 엄마 라우데스는 아무리 바쁘게 일해도 일곱 살 벨키와 다섯 살 엔리케, 두 남매를 먹여 살릴 길이 없는 온두라스에 사는 싱글맘이다. 극한에 달하고, 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택한 것은, 미국으로 밀입국하여 아이들에게 돈을 송금하는 것이다. 엄마가 없어 천덕꾸러기가 되어 친척집을 전전하며, 엄마가 보내주는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생계를 이어갈 수는 있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면 돌아온다고 달래고 달래던 엄마는 십 수 년이 흘러도 만나볼 수가 없다. 풍족한 것도 아니지만 엄마가 상실되었기에 누릴 수 있던 모든 것들은 벨키와 엔리케 같은 아이들에게 결코 감사의 대상이 아닌, 한없는 증오와 그리움에 다다른 애증의 대상일 뿐이다. 갓 10대를 넘긴 아이건, 장성한 나이가 되어 희미한 엄마의 잔상만 남은 아이건, 미국으로 떠나버린 엄마를 가진 중남미 국가의 엔리케들은 거리와 사춘기와 마약을 거쳐 죽음의 기차에 오른다. 달리는 기차에서 지붕과 화물칸을 넘나들 수 있어야하며, 갱들과 갱보다 더 무법자인 현지경찰, 이민국직원들에게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 당해야하고, 구타, 강간, 굶주림, 강도, 공포, 고독, 죽음을 겪어내며 멕시코의 리오그란데 강까지 이르기 위해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으면 거듭될 여정을 떠난다. 오직 엄마를 만나기 위해. 소냐 나자리오는 엔리케가 122일 동안 8차례의 시도 끝에 다다른, 엄마에의 사투를 5년의 추적과 고증 끝에 세상에 내 놓았다. 엄마를 만나기 전에는 죽어도 죽을 수 없었던 아이, 엔리케, 엔리케들은 죽음의 기차에서 살아남았고, 인간보다 아귀를 닮은 법망을 뒤집어 쓴 무법자들의 총검을 피해 살아남았고, 절망과 희망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 마의 리오그란데를 살아서 건넜으니, 엄마를 만나 해피엔딩의 후일담을 들려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죽음을 이겨내고 신세계에 건너온 아이들에게 남은 것은 타인과 다를 바 없는 엄마와 새 가족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아웃사이더가 된 자신, 또 다시 거리와 마약과 알콜로 내몰리는 현실의 문제이다. 엔리케가 라우데스를 포용하지 못한 채, 현실과 맞닥뜨려 결국은 엄마와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장면에 이르면 <엔리케의 여정>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기본적인 메시지로 회귀한다. 여전히 중남미의 가진 것이라고는 모성뿐인 절망에 빠진 엄마들이 선택해야하는 밀입국, 여전히 죽음의 기차를 타고 ‘엄마’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의 모든 부분에 치명적인 상흔을 얻는 아이들, 여전히 미국의 이민정책의 양면성으로 괴로워하는 불법이주민들과 그 자녀 사이의 격한 단절감. 대체 어디서부터 메스를 대야 죽음의 기차의 핏빛 질주를 막을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으로 끊임없이 밀입국을 감행해야 하는 싱글맘과 노동자들을 포용할 길 없는 중남미 산업 구조의 취약성과 피폐함을 회복시킬 수 없고, 미국이 불법이민자들로부터 얻는 산업적인 성과와 희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으며, 죽음의 기차에 매달려 희망처럼 포장된 구원이라고 믿는 해후에 배신당하고 마는 엔리케들을 감싸안아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떠나 물질로 행복을 보상하려는 엄마들의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고 실행하려는 움직임들을 멈추지 않을 계기가 되어 줄 수는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