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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 [포토] 야만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조회수 : 17985
글쓴이 : 대지의속삭임 날짜 : 2012-07-02 14:35:00 추천 : 0 반대 : 0
첨부파일 : 김훈사진_20120702143718502.jpg



야만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간단히 허기를 속이고 돌아와 보니, 어느새 좌석은 거의 꽉 차있고 이벤트 홀 옆과 뒤에는 사람들이 그득그득했다. 매의 눈으로 간신히 발견한 자리에 앉아, 겨우 숨을 돌리자, 저자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질의응답

《흑산》의 구상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하게 되었나?

일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절두산 성지를 보면서 구상하였다. 자유로를 따라서 서울에 드나들 때마다 항상 이 작은 흙더미 부근에서 교통체증으로 차가 밀린다. 마치 대도시의 일상 속에 야만의 증거와 같이. 그때로부터 10년 후에 《흑산》을 저술했다.

신앙인의 자세로 천주교 박해에 따른 순교를 다룬 것인가?

인간세상은 본래 온갖 잡놈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이 소설에도 순교자, 배교자,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 등 다양한 사람이 나올 뿐이다.

정약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왜 정약현(丁若鉉),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 4형제 가운데 정약전에 주목하였는지?

정약전은 주인공이 아니다. 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고 각자의 삶을 균등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정약전이 이 소설의 프레임뼈대를 이루는 인물인 것은 맞다. 나는 정약전이 그 깜깜한 섬 흑산의 현실을 긍정하였다는 점에서 좋아한다. 좌절하지 않고 암흑으로 가득 찬 섬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쳐서 작은 희망의 씨를 뿌리는 등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태도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흑산》의 정약전이나 《남한산성》의 김상현이나 구차하고 명분에 反하지만 죽지 않기를 잘했다는 태도를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삶을 가치 있다고 보는 작가의 태도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

《흑산》에서 순교와 배교의 갈림길, 《남한산성》에서 항전과 항복의 갈림길에서 보듯 두 책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배교와 항복이라는 작가의 선택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순교와 배교, 항전과 항복이 양극단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을 공존 불가능하게 하다는 사실이 인간세상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볼 때, 정약전보다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은 정약용이 동료 교도를 밀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배교를 수행하여, (그 결과로) 강진으로 유배 가는 특혜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게 있어 배교는 배신이 아닌 선택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4형제 중 장남인 정약현에 대한 묘사가 가장 긍정적이었는데?

작가의 가장 많은 편애를 받은 캐릭터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유교적 인격의 완성자로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한국남자의 속에 흐르는 가부장적 인자를 잘 구현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적이라고 하면 마초와 같다고 보는데, 나는 남자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부담하고 여자를 보호하고 위하는 것이 가부장적이라고 알고 있다. 여자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날라리 건달이나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마초와 달리 가족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 가부장적인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는 여자의 등장빈도가 현저하게 낮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자가 등장하면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칼의 노래》에서도 그래서 결국 여주인공인 여진을 50페이지 만에 죽게 했다.

김훈의 연애소설은?

명함을 주고받는 관계 정도가 나의 연애감정 표현의 한계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장악하지 못해서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연애소설은 못쓰는 것 같다.

말(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혹은 회의가 있는 것 같은데?

언어, 기호, 책, 인터넷 등의 매체에 의해 인간이 세계와 차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법이 《노자》에서 언어가 필요 없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듯이, 또 다른 언어를 동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성聖의 영역에서는 해소 가능할지 몰라도 내가 속한 속俗의 영역에서는 어렵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에서 청(淸)의 황제[칸]가 보여주는 글/말에 대한 생각이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인가?

청淸의 황제[칸]라는 약자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군사깡패의 말은 내 생각과 다르다.

문학기자 시절의 화려하고 관능적인 문장과 현재 작가로서의 보여주는 단호하고 뼈대만 남은 듯한 짧은 문장은 다르다. 마치 기자로서의 문체와 작가로서의 문체가 바뀐듯한데?

기자로서 잘 쓰는 문장은 정당한 경로를 거쳐 수집한 사실을 논리적으로 쓰는 것이지, 화려하게 쓰는 것이 아니다. 또 굳이 소설의 문체가 화려해야 할 필요도 없다.

독자 질문

기자와 작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기자는 6하의 원칙에 따라 글을 쓰지만, 진실은 6하의 원칙 너머에 있는 것 같다. 작가는 허구의 세계에서 글을 쓰지만 그 바탕에는 6하의 원칙이 존재해야 한다. (10년 전 작가 강연회에서의 만남, 원하는 학과가 아닌 다른 과에 진학하고 도피성으로 군대에 입대한 이야기 등을 중언부언하다가)

사랑과 구원을 말하지 못하면서 왜 글을 쓰는가?

(사랑은 앞에서 이야기 했고) 구원은 뭔지 잘 모른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그런 사례를 본적이 없다. 질문이 공허하다. 대학에서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 어떤 책을 읽는가?

(꼰대처럼 보이겠지만) 당신은 도대체 뭐가 힘든가? 힘들다는 의식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힘이 되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책 속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책을 많이 읽었어도 길은 없었다. 단지 글자만 있었을 뿐이다. 길은 세상에 있고, 책에는 지식과 정보가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장악하지 못해서 쓰지 않았다고 했고, 언어는 결핍의 수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사랑이 충만하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너무나 많은 이들이 연애/사랑에 대해 얘기하기에 대한민국이 연애중독에 걸린 나라 같아서 오히려 큰일이다. 그렇기에 힘든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도 사회적 연대 속에서 책임이 있다. 우리시대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행태는 사회의 발전을 막는 장애물이다. 부모의 사랑이란 옆집 자식도 함께 보는 것인데 내 새끼만 챙기는데 급급하면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날을 버르장머리 고치는 날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예정되어 있던 사인회를 마지막으로 저자와의 만남은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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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환영》 김이설 작가와 만남 - 2012년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